
넷플릭스를 켜두고 뭘 볼까 스크롤만 내리다가 그냥 틀어버린 드라마가 끝날 때쯤엔 화면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던 경험, 한 번쯤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JTBC 드라마 괴물을 만났습니다. 요즘 화제였던 허수아비와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집었는데, 보는 내내 범인이 누구인지 머릿속으로 계속 추리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몰입감을 끌어올리는 구조, 어디서 오는 걸까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 장면, 왜 이렇게 긴장되지?"라는 순간이 오는데, 괴물은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봤는데, 결국 드라마의 서사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란 이야기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하는지를 의미하는데, 괴물은 주인공인 동식조차 처음엔 의심스럽게 그려지는 방식을 택합니다. 시청자도 경찰인 한주원과 같은 시선으로 동식을 바라보게 되는 구조입니다.
20년 전 여동생 이유연이 손가락 열 마디만 남기고 실종되었고, 같은 날 친구 방주선은 사망 상태로 발견됩니다. 그 현장에서 동식의 기타 피크가 나왔고, 그는 용의자로 지목됐다가 풀려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동일한 수법의 사건이 다시 발생합니다. 이 설정 하나만으로도 시청자는 동식이 범인인지 아닌지를 계속 의심하면서 보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의 드라마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괴물이 호평받은 이유 중 하나는 복선(伏線) 처리 방식입니다. 복선이란 나중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암시하는 장치를 말하는데, 이 드라마는 대사 하나, 행동 하나가 다 이유 있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식이 정제에게 "이번 일에 관여되지 마라"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타월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중에 전부 연결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흘려보낸 장면들이 전부 증거였으니까요.
괴물이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한 마을이라는 폐쇄적 공간 안에서 사건이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밀실 서사(closed community narrative)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한정된 공간 안의 인물들 사이에서 갈등과 사건이 발생하며, 내부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아 긴장감이 극대화되는 방식입니다. 마양읍이라는 작은 마을에 얽힌 모든 인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신뢰했던 사람이 범인일 수 있다는 공포가 드라마 내내 깔려 있습니다.
심리전이 드라마의 핵심인 이유
추리물을 꾸준히 챙겨보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괴물은 단순한 범인 찾기 드라마가 아닙니다. 동식과 주원 사이에 벌어지는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이 드라마의 핵심입니다. 심리전이란 상대의 판단력을 흔들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언어적·행동적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말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 장면마다 이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집니다.
주원은 동식이 연쇄 살인범이라 확신하고 그를 몰아붙이고, 동식은 진짜 범인을 잡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처럼 내세웁니다. 동식이 일부러 혈흔을 지하실에 남겨두고 주원이 발견하도록 유도한 장면은, 제가 보면서 "이게 자백인가, 함정인가"를 혼자 계속 따지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건 동식이 스스로 잡혀 들어가면서 판을 뒤집기 위한 설계였고요.
드라마가 이런 심리전을 효과적으로 그릴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내공 덕분입니다. 국내 드라마 시청률 및 시청자 반응 조사에서도 괴물은 "배우들의 눈빛 연기가 대사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주원이 금화의 이름을 실수로 말하는 장면에서 동식이 바로 판세를 뒤집는 순간, 그 순간의 표정 전환은 대본 없이는 불가능한 연기였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저를 오래 붙잡아 둔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동식이 지하실 혈흔을 그대로 남겨두고 주원이 발견하도록 유도한 장면
- 주원이 금화의 이름을 실수로 발설하며 동식에게 역전당하는 대화
- 할머니가 소금을 뿌려도 "짭짤하니 좋다"며 웃는 동식의 모습
- 진묵이 딸을 살해하고도 경찰서에 김치를 들고 오던 장면
각각의 장면이 단독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맥락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더 소름 돋는 장면들입니다. 추리물에서 이런 재감상의 재미가 있다는 건 그만큼 구성이 탄탄하다는 증거입니다.
연쇄살인 서사가 남긴 무게
드라마 전반에서 사용되는 핵심 개념이 연쇄 살인(serial murder)입니다. 연쇄 살인이란 동일한 범인이 일정한 패턴이나 수법을 반복하여 복수의 피해자를 살해하는 범죄 유형을 말하며, FBI 행동과학부의 정의에 따르면 각 사건 사이에 '냉각기(cooling-off period)'가 존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출처: FBI 공식 사이트). 괴물에서도 20년이라는 긴 공백이 존재하며, 그 사이에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이 설정이 무거운 이유는 단순히 범인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년 동안 유력한 용의자로 몰려 살아온 동식의 이야기, 믿었던 친구 진묵이 범인이었다는 사실, 매번 드나들던 지하실에 여동생의 흔적이 있었다는 결말까지. 제 경험상 드라마를 보고 나서 이렇게 오래 여운이 남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재미있다고 추천하기가 어려운 드라마'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재미있는 건 맞는데, 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무겁습니다.
진묵이 "난 돌려줬어, 못 찾은 건 너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던 건, 그 말이 그냥 잔인한 게 아니라 20년 내내 동식 곁에 있었던 인물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동식이 어머니를 부탁했던 그 친구가 범인이었다는 것, 그 무게를 과연 누가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괴물이 단순한 범죄 드라마를 넘어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범인의 정체보다도, 그 범인과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상처가 더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분명 끝까지 붙잡혀 보실 겁니다. 다만 감정적으로 무거운 작품이라는 점은 미리 알고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에서 현재 감상 가능하니, 여유 있는 주말 저녁에 1화부터 차분히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