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계인이 먼저 공격했다고 확신하고 계셨나요? 저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참을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장면들을 되짚어 보니,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영화 호프는 단순한 외계인 침공 액션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관객의 시각을 끊임없이 뒤흔드는 서사 구조가 숨어 있습니다.
외계인이 먼저 공격한 게 아니었다는 세계관 설정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남자친구와 함께 개봉 전부터 액션씬 기대로 보러 가기로 했던 영화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액션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려면 외계인들의 배경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고향인 게르트는 거대한 제국으로, 여러 종족과 세력을 아우르는 복합 정치 체제를 가진 곳입니다. 여기서 세자(世子)란 황제의 후계자를 뜻하는데, 황제 쿠얼과 황후 조르의 아들 칼리가 바로 그 세자입니다. 이들이 지구에 도착한 것은 애초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선이 호포항 인근에 불시착한 사고였고, 지구인을 공격할 의도 자체가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린 칼리는 혼자 마을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양배에게 살해됩니다. 양배는 칼리를 지능과 감정을 가진 생명체가 아닌, 희귀 생물 즉 돈이 되는 사냥감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냉동 창고에 보관합니다. 이것이 영화 속 모든 비극의 발단입니다.
바미기르가 마을을 폭주하며 공격하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예고편을 보지 않고 갔기 때문에 저 생물이 외계인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사람 모습과 비슷하게 생긴 걸 보고 실험 중 변형이 일어난 인간인가 싶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숲속에서 우주선이 등장하는 순간 비로소 외계인이구나 했는데, 그때부터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영화에서 인간 편도 외계인 편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관객을 계속 세워두는 방식이 이 영화의 핵심 서사 전략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 작품을 산부작(3부작) 시리즈로 기획했고, 영화의 시간대는 소해 사체가 발견된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입니다. 이야기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에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외계인의 감정과 반전, 그리고 관객의 불편함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저는 범석 캐릭터를 보면서 묘한 불편감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순간 터져 나오는 이기심, 자기 생존만을 위한 선택들이 오히려 외계인보다 더 동물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은 외계인이 무섭고 인간이 피해자라고 느낀다고 하는데, 저는 중반부터 그 경계가 계속 흔들리는 게 보였습니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이 도덕적 역전(Moral Reversal)이라는 서사 장치가 있습니다. 도덕적 역전이란 관객이 처음에 옳다고 믿던 편이 나중에 가해자처럼 느껴지는 방식으로 시각을 전환시키는 연출 기법입니다. 냉동고 속에서 발견된 칼리의 시신은 인간 어린아이와 거의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고, 이 장면을 본 순간 관객은 처음으로 재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인간들이 외계인들에게 처참하게 사냥당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외계인의 입장을 막 이해하기 시작한 관객이 다시 인간 편으로 돌아가는 구조입니다. 이게 반복됩니다. 외계인이 이해된다 싶으면 인간이 죽고, 인간이 안쓰러운 순간엔 또 외계인의 사정이 드러납니다.
양배가 성기 대신 고양이를 구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관객은 사람보다 고양이를 선택한 양배에게 강한 혐오를 느끼지만, 이것은 우주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이 고양이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문명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면, 그 선택이 외계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프가 단순한 몬스터 무비(Monster Movie)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몬스터 무비란 공포스러운 괴물이 인간을 위협하는 장르를 뜻하는데, 호프는 괴물의 정의 자체를 영화 내내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불편함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외계인들 각자의 배경도 주목할 만합니다. 조르는 평민 출신이지만 황후가 된 인물이고, 마베이오는 조르를 호위하는 군인, 아이보도르는 칼리의 보모입니다. 바미기르는 하층민 출신 노동자이고요. 이들이 단순히 동일 집단으로 뭉뚱그려지지 않고 각자의 신분과 역할이 세밀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점은, 이 영화가 단순 외계인 침공 서사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반전 결말과 믿음의 의미, 쿠키 영상 해석
영화 결말 직전, 4DX 상영관 안의 관객들이 다들 "이게 끝?"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미리 '뭐지?로 끝난다'는 평가를 인스타에서 접하고 알고 갔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외계인들끼리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당시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황제 쿠얼의 정체가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설정입니다. 감독은 쿠얼을 기독교에서 여호와, 즉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 상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거대한 우주선이 지구에 추락하며 폭발하는 장면은 단순한 액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인간 세계의 신이 죽는 순간을 담은 것입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서사 이중성(Narrative Dualit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서사 이중성이란 같은 사건이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구조를 말합니다. 쿠얼의 죽음 역시 이 구조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의 소멸이고, 외계인에게는 정치 체제의 붕괴입니다.
이때 조르의 마지막 대사는 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을 레퍼런스로 삼고 있습니다. 해당 구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조르는 칼리의 부활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을 기반으로 마베이오에게 운명을 바꾸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베이오는 자신의 심장을 꺼내 칼리를 되살리겠다고 맹세하죠.
영화에서 인간과 외계인이 서로 거울처럼 대응하는 캐릭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기 ↔ 마베이오: 성기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는 끈질긴 생존 본능을 가진 인물, 마베이오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놓는 희생의 상징
- 양배 ↔ 조르: 양배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명의 가치를 재단하고, 조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행동을 선택
- 범석 ↔ 바미기르: 범석은 생존 앞에서 이기심이 극대화되는 인물, 바미기르는 칼리를 찾으려는 절박함과 분노가 뒤엉킨 존재
쿠키 영상에서 성기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 이것이 인간 쪽에서 먼저 "보이지 않는 것도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장면이라는 해석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성기의 생존이 마베이오의 심장으로 이루어질 칼리의 부활에 대한 복선으로 읽히는 순간, 이 영화가 훨씬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됩니다.
영화 연구 분야에서는 관객의 시점 조작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유보시키는 서사 방식을 포컬라이제이션(Focalization)이라고 부릅니다. 포컬라이제이션이란 어떤 인물의 시각을 통해 정보가 전달되느냐에 따라 관객의 감정과 판단이 달라지는 서사 기법입니다. 호프는 이 기법을 영화 전체에 걸쳐 인간과 외계인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교차시킴으로써, 관객이 어느 편도 편하게 응원할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영화 서사 이론적 분석은 관련 학술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학회).
예고편 없이 보는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는 의견이 많은데, 저는 완전히 동의합니다. 저는 예고편을 보지 않고 갔기 때문에 외계인의 외형도, 외계인이라는 사실 자체도 모른 채 입장했습니다. 그래서 첫 등장까지의 긴장감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외형이 드러날 때마다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4DX 상영관에서 처음 바미기르의 모습을 봤을 때 남자친구와 눈을 마주치며 "진격의 거인...?"이라고 웃었던 그 순간도, 예고편을 봤다면 불가능했을 경험입니다. 참고로 나홍진 감독의 전작인 곡성 역시 유사한 서사 전략을 사용한 바 있으며, 두 영화의 연출 방식은 영화 비평 측면에서 나란히 분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씨네21).
호프는 결말이 명확하지 않아 불만족스럽다는 의견도 있고, 오히려 그 열린 결말이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영화관을 나오고 나서 세계관 정리를 찾아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 보고 나서도 장면들이 계속 떠오르는 영화라면, 그것 자체로 충분히 잘 만든 영화라고 봅니다. 2편과 3편이 나온다면, 오늘 이 글에서 풀어본 설정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꽤 기대가 됩니다.